- 초판: 2017년 7월 25일
- 지은이: 안휘경, 제시카 체라시
- 옮긴이: 조경실
- 펴낸곳: 행성B잎새
- 읽은 기간: 2018년 1월
책의 제목을 봤을 때 약간 안심했다. "현대미술은 처음"이나 다름없는 나에게 딱 적절한 수준일 것 같아서였다. "큐레이터가 들려주는 친절한 미술 이야기"라는 부제까지 달려 있으니 이보다 상냥한 입문서가 있을까 싶었다.
책을 읽기 앞서 지금까지 접해왔던 미술 관련 경험을 떠올려보았다. 초중학교까지는 제법 미술 수업다웠다. 무언가를 그리고, 만들고, 붙이고, 부수면서 온 몸으로 미술을 경험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단지 시험을 치르기 위한 암기 과목이거나 못다한 국영수 공부를 하는 자습 시간으로 활용되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로는 교양 수업을 듣거나 미술관을 찾지 않는 이상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 시간을 10여년 넘게 보냈으니 다시 생각해도 처음이나 다름없다.
책을 펼치고 목차를 본 순간 구성이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제목이 A부터 Z로 시작하는 단어로 이루어져 있고, 이 소제목들은 어떠한 중제목으로도 묶여있지 않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듯 보이면서도 들어가는 문(글쎄, 예술을 어디에 쓰냐고?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과 나오는 문(나오면서. 미술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을까?)은 분명해 보였다. 구성 자체가 하나의 작품 같았다.
처음에는 순서대로 읽다가 나중에는 호기심이 가는 챕터를 먼저 읽었다. 예를 들면 '개념도 작품이 된다고?' 라든가 '왜 다들 예술을 하려고 할까?', '미술관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등이 그것이다. 공통점이라면 일상과 가까이에 있으면서 한번쯤 고민해봤을법한 질문이다.
미술아냥을 신청한 이후로 미술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의무감 같은 것이랄까. 마침 지인으로부터 마리 로랑생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들었고, 지난 일요일 점심 무렵에 전시가 열리고 있는 예술의 전당을 다녀왔다.
전시를 보기 전까지 나는 마리 로랑생에 대해 거의 아는 정보가 없었다. 그럼에도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기대감과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마리 로랑생의 작품을 직접 본다는 기대 못지 않게 '예술의 전당'이라는 공간에 간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이 책에도 '작품보다 오히려 건물(미술관)이 주목을 받아서 작품 감상을 방해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볼 때, 한번쯤은 비슷한 경험이 있으리라 짐작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마리 로랑생 전시는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집으로 오는 길에 생각해 보았다. (만약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만족스러운 이유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첫번째는 작품이 좋아서였다. '왜' 좋았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전시의 부제처럼 황홀한 색채 때문일 수도 있고, 그림에서 풍겨나오는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다.
두번째는 전시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이를테면 가방을 사물함에 넣어두고, 티켓을 발권받고, 오디오 가이드를 빌리고, 전시를 보고, 전시장 밖으로 나와서 기념품을 구매하는 것과 같은 사소하지만 중요한 요소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전시 도중에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장시간 서있는 상태에서 관람하다보니 시간이 갈수록 피곤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졌다. 전시 초반부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던 것을 떠올려보면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듯하다.
미술관 한 번 다녀와서 이런말을 하는 것이 성급할 수도 있지만 현대미술을 알아가는 한 가지 방법은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을 찾는 일인 것 같다. 좋아한다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재미나 감동 느꼈다는 의미이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한 것처럼 재미에는 엄청나게 강한 힘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미술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어떤 음악을 듣고 그것이 왜 좋은지 분석하지 않는 것처럼 미술도 이런 저런 이유없이 '그냥' 좋은 작품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그 때의 느낌을 떠올리기 위해 인터넷에서 마리 로랑생의 작품을 검색했다. 역시나 그 때만 못하다. 공연은 콘서트장에서 봐야 제맛이고, 스포츠는 경기장에서 봐야 제맛인 것처럼 미술은 미술관에서 봐야 그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 끝 -